무언가를 쟁취해낸다는 것은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할 일입니다.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옛날이라면 다를까요? 역사를 보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 보이지만 수 천년 간 지나온 사람들을 생각했을 때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특히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이 권력이나 돈 같이 만지고 휘두를 수 있는 것이라면 목숨을 거는 분들이 많았으나 명예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거신 분들은 훨씬 적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다루게 될 '사마천'이라는 인물과 그가 쓴 「사기」는 동양 역사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 생각하여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마천의 생애
<「사기」를 물려받다 >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한나라 때 '태사령'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는 관리였습니다. '태사령'은 달력이나 역사 편찬, 고문서 관리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역사에 대해 사마천은 일찍이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견문도 넓히는 교육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관리에 올라 여러 고문서를 보면서 역사서를 편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마담은 한무제(왕)의 봉선에 참석하지 못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화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봉선은 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제사를 뜻하는데 이런 자리에 참석받지 못한 것은 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고 사료됩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관직도 물려받고 아버지의 프로젝트도 사마천은 물려받게 됐습니다. 이때 받은 관직의 이름을 따서 사마천은 '태사공'(태사령의 관직을 했다는 뜻)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 '이릉'을 변호하다 >
사기를 편찬하던 중 사마천의 신분에 위협이 가해지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한나라의 무제는 흉노족을 토벌하기 위해 '이릉'이라는 장군을 앞세웠습니다. 하지만 전투 중 '이릉'은 포위를 당하고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장수가 전쟁에서 패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렇기에 한무제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다른 신하들은 이에 동조하여 '이릉'을 죽이고 삼족을 멸하자는 극단적인 처벌을 제의했습니다. 이에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하고 나섰습니다. 지금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논리와 근거를 들어 반박을 하였지만 한무제는 그리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라 그런 사마천까지 매우 괘씸히 여겨 사마천을 사형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 궁형을 극복하다 >
당시에는 정치적인 이슈로 사형을 당하게 되면 2가지 선택권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는 천금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돈을 주어서 풀려나거나, 궁형(남성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형)을 받고 살 수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태사령'이라는 직급으로 받는 녹봉으로 풀려나기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궁형을 한다고 하면 당시의 의료기술이나 환경을 생각했을 때, 감염으로 죽는 이들도 많았고 무엇보다 치욕스러움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이도 적었기 때문에 범인이라면 사형을 받아들였을 겁니다. 하지만 사마천에게는 살아가야 할 목표, 단 한 가지! 바로 「사기」를 완성해야 된다는 집념으로 궁형을 받아들입니다. 사마천은 감옥에서도 계속해서 「사기」를 집필을 계속하였고 훗날 다시 왕의 신임을 얻어 환관으로 복귀하여 「사기」를 완성합니다.
왜 「사기」는 특별한가?
< 역사를 담아내는 새로운 그릇, 기전체 >
기전체는 「사기」에서 시작된 형식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역사서를 생각할 때 대체로 시간 순서대로 사건이 나열될 것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시간 순서대로 나열한 방식을 '편년체'라고 부릅니다. 반면 '기전체'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때문에 인물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깊이있는 시대 묘사가 가능해졌고 에피소드를 통한 문학성도 더해져 재미있고 메세지성이 강한 역사서 「사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사기」는 5가지로 분류됩니다. 황제급으로 분류되는 인물을 다룬 이야기 '본기'와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을 다룬 '열전', 권력을 가진 집안 또는 학파를 다룬 '세가'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시대의 흐름을 보게해주는 '연표'와 제도와 기술의 발달을 다루는 '서'가 있습니다. 여기서 본기의 '기'와 열전의 '전'을 따서 '기전체'라고 불리게 됩니다.
< 시대정신을 담아내다 >
역사는 흔히 권력자의 입맛에 맞추어 바뀌기 좋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은 자신이 모시던 한무제의 입맛에 맞춰 「사기」를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한나라의 초대 왕인 '유방'과 맞서 싸운 '항우'를 본기로 기록하였습니다. 심지어 '유방본기'보다 '항우본기'를 먼저 앞세운 것으로 보아 권력에 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폭정을 가한 임금들을 국가의 멸망의 원인임을 비판하고 「혹리열전」에서는 백성들을 괴롭혔던 인물들도 적어내어 애민정신도 매우 강조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 본 글은 '휴식을 위한 지식 전쟁사, 문명사, 세계사'라는 팟캐스트에서 많은 부분을 발췌하고 요약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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